미국 정보기관 OSS의 조선인 특수 요원 A,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이었다
유한양행의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일한 박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비밀 정보 기관인 OSS(전략박사무국)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tvN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영상에 따르면, 유일한 박사는 미국 정보기관 역사상 최초의 조선인 특수 요원이자 '냅코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인 암호명 'A 요원'으로 활동했다.
미국 OSS의 비밀 작전 '냅코 프로젝트'와 요원 유일한
영상 속 설명에 따르면 '냅코 프로젝트'는 미국 OSS가 일본 본토 공격 전, 일본의 병참 기지였던 조선에 비밀 공작원을 침투시켜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후방을 흔들기 위해 세운 작전이다. OSS는 조선인 요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일본군의 정보와 경제 상황을 수집하고 무선망 설치 및 파괴 공작을 수행할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에 참여한 19명의 요원은 매우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쳤다. 후보군은 일본군에 동원되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들과 미국 대학을 졸업한 재미 조선인들이 중심이었다. 최종 선발된 요원들에게는 A부터 S까지의 암호명이 부여되었으며, 그중 중심 역할을 맡은 'A 요원'이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였다.
선발된 대원들은 샌프란시스코 인근 산타 카탈리나 섬 훈련소에서 3~4개월간 격리된 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 내용에는 복싱을 비롯해 선전 선동, 정보 수집, 적에게 잡혔을 때 탈출하는 기만술 등이 포함되었다. 유일한 박사가 참여한 팀은 서울에 침투해 일본군의 병력과 군수시설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작전 실행을 며칠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대원들은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작전 종료 명령을 받았다.
숙주나물 사업가에서 유한양행 설립까지의 여정
유일한 박사의 행보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1904년 9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09년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해 미 육군사관학교 방식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후 미시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 자유 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여해 결의문 작성과 낭독을 맡으며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미국에서의 사업가 활동도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미국 내 중국 음식점에서 숙주나물이 많이 쓰인다는 점에 착안해, 보관이 용이한 통조림 형태의 숙주나물을 개발하며 30대 초반에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25년 조선을 방문해 일제 치하의 열악한 보건 현실을 목격한 그는 전 재산을 정리해 귀국했으며,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 설립 후에는 '건강한 국민이 있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의약품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소염진통제인 '안티프라민'이 있다. 영상에서는 당시 시골 지역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품을 깡통 형태로 제작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사회 환원 철학
유일한 박사는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을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1943년에는 책을 출간하여 식민지 조선의 독립 의지를 미국 사회에 설득하는 데 힘썼다. 50세의 나이에 참여한 OSS 냅코 프로젝트는 그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수행한 가장 극적인 활동 중 하나로 꼽힌다.
해방 이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및 장학 사업에 매진했다. 영상은 그를 미국에서의 독립 홍보, 사업을 통한 자금 마련, OSS 작전 참여, 그리고 해방 후 교육과 기업을 통한 미래 준비를 모두 수행한 인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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